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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그대 Y에게

 

 아침에 운동다녀오며

 또 작은아이를 데려다주며 문득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짙은 초록이 어느새 연둣빛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붉어지기도 합니다.

 가을이 되면 멀리 못가더라도

 그 가을빛은 눈 안에 담아두기위해

 과천 서울랜드가는 길의 그 길을 떠올리곤 합니다.

 그러나

 낙엽 밟으며 걷기엔 아직은 이른감이 들어

 오늘 거기에 가야겠다는 생각은 안들었지요.

 

 매일매일 4시간씩 자며 공부하는 아들아이 지켜보며 졸리면

 10분 재우고 깨워주고

 안자려는 아이 다독여서 재우고

 아침이면 또 깨워주고 하느라

 녀석만큼 제게도 잠은 부족한 며칠이었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바깥바람도 좀 쐬고 쉬고 싶었습니다.

 오후의 일을 다 미루고

 좀 쉬기로 했지요.

 

 먼저

 술을 잘 못마시는 친구에게

 같이 밥먹자고 했더니 무슨 고민이 있는지 별 반응이 없네요.

 

 이건 술을 마시라는 신의 계시구나 싶어

 제 술친구에게 오랜만에 문자를 보내보았습니다.

 아쉽게도 바쁜 일이 있어서 같이 못마셔준다네요..

 

 그냥 심통이 나서

 전화를 걸어 좀 투정을 해도 되는 친구에게 연락을 했지요.

 이 친구는 한달음에 달려오기 좀 먼 거리에 살아서

 얼굴 보기 어렵지만 나랑 놀아줄 사람이 없다고 퉁퉁거렸더니

 농담으로라도 제 응석을 받아줍니다.

 

 그래도

 아무도 못보았지만 기분은 다소 나아졌습니다.

 

 어제 저녁에 영화를 검색하며

 오늘은 기필코 영화도 한편보고

 혼자서 좀 돌아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요.

 

 오늘 시험이 끝난 큰아이가 시무룩해 있어서

 같이 나가서 영화도 보고 맛있는 밥도 먹고 들어올 예정이었거든요.

 

 처음엔 동대문 종합상가에 갔지요.

 조각잇기라고 번역이 될까요? 제가 예전에 취미로 하던

 퀼트에 필요한 재료를 사러 갔지요.

 

 한달에 한번 정도는 재료도 사고 천도 사러 들락거리던 곳인데

 오륙 년은 통 못다녔네요.

 

 가을빛을 담은 예쁜 가방 하나 만들고 싶어서

 홀린 듯이 천들을 고르고 바라보니

 아들놈은 벌써 싫증이 나서 툴툴거리고 있었습니다.

 

 천도 사고 퀼트용 솜도 사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하나씩 만들어주기 위해

 장식으로 다는 예쁜 종도 여러 개 샀지요.

 

 그리고 몇 정거장 되는 거리에 있는 인사동에 가려고 했습니다.

 언제나 나사가 하나씩 빠져 있는 큰아들놈은

 버스카드를 가지고 오지 않아

 이명박  전시장이 구현한 지하철 버스 환승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꼬박꼬박 돈을 내는 게 아깝긴 했어도 참을 만 했지요.

 

 버스를 타고 종로2가에 내려서 보니 아들놈이 없는 겁니다.

 또 장난치고 숨어있나 싶어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안보이는 겁니다.

 

 분명히 다른데 정신팔고 있다가 내리자고 말하는 걸 못듣고

 계속 타고 간 듯 해서 그 자리에서 어찌할 줄 몰라 20분을 기다리니

 전화기가 울립니다. 아들아이는 핸드폰이 아직 없습니다.

 녀석이 늘 애용하는 콜랙트콜로 전화를 해옵니다.

 

 어디냐고 물으니 독립문까지 가서 엄마가 안보여

 내렸다네요. 다섯 정거장 되는 거리까지 가서야 알았다니

 정말 한심하죠?

 

 오늘 오후의 달콤한 내 계획은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갔지만

 아들놈 찾은 것만 다행으로 여기고

 꼼짝 말고 정거장에 있으라고 당부하고 그곳에 가보니

 녀석이 없는 거예요.. 다시 20분을 기다리니

 전화가 옵니다.

 

 녀석은 독립문에..

 저는 독립문 지하철 역에 각각 있었던 거죠.

 

 영화도 못보고 맛있는 것도 못먹고 해가 다 저물어갑니다.

 

 서둘러 집에 와 저녁을 먹이니 며칠 못잔 잠 때문에

 일찍 곯아떨어져 자네요.

 

 작은아이는 오늘 체육대회를 했다네요.

 그래서 그녀석도 오자마자 떨어져 잡니다.

 

 낮에 퀼트샾에서 사온 천들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돈벌이와 상관없는 취미생활이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하죠.

 행복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손이 많이 가는 퀼트를 다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그래도 틈틈이 바느질을 하고 싶어 재료를 사왔습니다.

 아이들 필통도 만들어주고 손지갑도 만들고

 그리고 천천히 내년 가을에 완성되더라도

 가을빛깔의 고운 가방을 꿰매고 싶습니다.

 

 그것은 기다림이기 때문이지요.

 제 안의 그리움을 잠재우는 손짓이기 때문이지요.

 

 바늘땀 속에 서린 시간의 멈춤을 확인하고 싶어서이지요.

 

 제가 한가해졌냐고 묻고 싶어지신다는 걸 알아요.

 한가하지 않아요.

 

 여전히 일상은 동동거리며 돌아갑니다.

 

 그래도

 그 틈에 아주 작은 여유쯤 부리며 살고 싶어

 호기를 부려봅니다.

 

 한땀 한땀 공들여가는 삶을 살고 싶어서입니다.

 

 삐뚤빼뚤해도 제 손으로 엮어가는

 조각들을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새책의 떨림만큼 퀼트천들도

 저를 설레게 합니다.

 거기엔 꿈의 조각들이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꿈을 꿉니다.

 조각이 이어져 완성되는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