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소통/한밤중 수다
베르베르의 <개미>를 읽다가 지하세계와 개미들의 왕국이 너무 지루하다 싶어져서 도서관에서 대출해온 김형경의 <외출>과 공선옥의<붉은 포대기>를 먼저 읽었다. 외출에선...이 시대의 불륜에 등장하는 풍속화에 혼자 실소를 머금었다. 디지털 카메라에 잡힌 동영상과 휴대전화에 잡힌 문자메세지로 해독되는 불륜의 증거들을 접하며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고 여겼다. 작년에 읽은 은희경의 소설집에도 블로그 이야기와 컴퓨터에서 행해지는 채팅이 일상언어로 그려지고 있는 것을 보며 변화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태되고 소외되고 말겠다는 생각을 혼자 했었다, 공선옥의 글은 이쁘지 않지만 사람사는 맛을 느끼게 해준다. 별로 곰살궂거나 다정하지 않은 가족에게도 따스한 욕지거리가 느껴졌다. 바보동생 수혜의 혼외 임신에 대해 작가는 따뜻한 생명정신을 담고 있다. 어머니로서의 대지 그리고 생명을 키우는 엄숙한 모성이 이 책을 통해 느껴졌다.
교외로 나가 밤을 지낸 아침...을 맞을 때는 나는 꼭 아침산책을 나간다. 잠자리가 바뀌어 잘 못자기도 하지만 이슬머금은 풀밭에 종아리가 적셔지는 그 차가움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새벽의 풀향기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며칠 전 흐린 아침에 우이천을 걷다가 이슬이 아직 맺혀있음을 보고 좋아서 잠시 쪼그려 앉아 그 이슬방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 퀼트강습 때 배운 실패모양이다. 나는 붉은 천을 모아 이것을 완성했고 지금은 우리집 프린터덮개로 사용한다.
아주 작은 선휘가 등교하는 아침
학교엔 누나 형들의 전교어린이회장 선거유세가 한창인지 등교길이 시끄럽다. 선휘는 그게 부끄러워 잘 보지도 않는다.
사진기만 들이대면 선휘는 똑같은 포즈를 잡는다. 시간이 더 많았던 큰아이를 키울 때는 절대로 이런 사진은 찍지 않았다. 아이가 노는 모습을 정말로 자연스레 담아주곤 했는데 작은아이는 그런 기억이 없어서인지 부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한다..
우이천에서 우아하게 걷고 있는 새 한마리를 만났다. 두루미? 황새? 역시 나의 지식은 우이천의 얕은 물처럼 부박하다.
밤에 선휘와 걸을 때 어둠속에서 떼지어다니는 물고기들을 보았다. 아침에 보니 이렇게 큰 물고기가 잘도 보인다.
흐린 아침 사람들은 걷는다. 걷고 또 걷고 걷는다.냄새나는 하천변을 걷는다. 냄새가 나긴 해도 차량은 안다니니까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나도 그 무리에 끼어 길을 걷는다. 아무도 없는 길을 혼자 걷는 것은 외롭기 때문일까? 이길을 걸 을때마다 채플린의 모던타임즈에서 보던 기계장치가 생각난다. 인생이란 삶을 마감하는 날까지 끊임없이 길 위의 삶을 걷고 있다는 생각이다. 혼자서 걷고 있지만 이처럼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게 동시대를 살고 있다는 일이다. 각자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빛깔의 옷을 입고 걷고 있지만 중요한 건 같은 시간에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그리고 같은 아침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공기를 호흠하는 것 그것이 살아가는 것이라고 여긴다.
흐린 아침.. 가만히 보면 물 밑으로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들이 보인다. 가만히 보면 내 글에도 내 마음이 보인다. 베르베르의 개미에 의하면 개미들은 더듬이를 맞대고 완전소통을 한다고 한다. 혼자서 절대로 살 수 없는 약한 존재들이라 집단을 이루면서 산다는 개미의 완전소통? 그걸 읽으며 요즘 생각해 본다. 사람에겐 완전소통이 안이루어지는 게 더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기심이 들키는 것 싫고 누군가를 흉보는 것 들키는 게 싫고 미워하는 게 들키는 게 싫기 때문이다.
한밤중 며칠 전 사진을 들추며 나자신과 완전소통하는 것으로 되었다고 여긴다. 우리에겐 더듬이 대신 언어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페로몬은 풍기고 다니는 것일까? 누군가 내게서도 매력을 느낄 정도로 페로몬은 지니고 있는 것일까? 아무래도 베르베르의 <개미>에 너무 심취해 있는 것 같다. 2권째 들면서는 진도가 더 잘난간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