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1014
2006. 10. 4. 23:31
제 목 :[일기] 99년 2월 17일 게 시 자 :sj0908 게시번호 :4062 게 시 일 :99/02/17 23:36:04 수 정 일 :99/02/18 22:53:43 크 기 :2.6K 조회횟수 :50 |
1999년 2월 17일 수요일
오늘은 연휴의 마지막날이다. 연어가 오직 냄새만으로 강을 거슬러올라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와 알을 낳듯이 명절엔 가족을 생각하고 부모님을 생각한다.
소원했던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눈도장을 찍으며 엄청 반가운 척 과장을 섞어 미소를 짓기도 하고 조카들에겐 용돈을 쥐어주며 이모노릇 고모노릇 외숙모노릇 큰엄마노릇 잘해내고 있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밥은 먹어야하고 설거지 또한 끊임없다. 과거에 배곯고 살던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 때문일까? 우리는 지지고 볶고 열심히 만들고 열심히 상차리고 먹고 배설하는 일에 참으로 열심이다. 대충 먹고 차마시고 음악들으며 한담하고 가족끼리 저녁바람 쐬면서 산책하는 것은 너무 밋밋한 내 희망사항일 뿐이다.
보이는 나와 본래의 내가 지닌 이중성은 무리없이 잘 섞여들어 튀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도 웃고 떠드는 일에 중독되어 여전히 같은 습관을 되풀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족이란 공통분모 외에 서로 다른 취향을 지닌 가족이 모여 나눌 이야기는 겉돌게 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친정에 가서 아버지 회갑연 때 촬영한 비디오필름을 식구들과 같이 보며 한참 웃었다.
92년! 난 그때 아이를 임신한 새댁이었다. 91년에 결혼했으니 신혼1년차였고 지금보다 7년은 젊었지.
아버지 누워계시던 자리를 쳐다보며 한동안 그 막막함에 쓸쓸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 부음을 듣고 달려가 병원 영안실에서 내내 설사를 해댔었다. 그때처럼 또 배가 아파와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차례나 제사를 지내실 때면 아버지는 늘 되뇌이곤 하셨지. 귀신은 어디에도 없다. 이건 살아있는 자손들의 의식일 뿐이지. 부모의 기일날 핑계삼아 형제들이 모여 부모를 기억하고 서로 얼굴보며 화목하게 지내란 의미일 뿐이라고 말씀하시곤 했었다.
아버지의 책중에서 내가 유산으로 받은 것은 한국고전문학전집 5권이다. 할머니께서 보시고 아버지께서 보시던 책.
내가 어려선 뜻도 모르고 읽어대던 책. 어느날 친정에 갔더니 아버지께서 그책을 내게 주셨었다. 가지고 가거라. 이 책을 귀하게 여길 사람도 너뿐이고 그 가치를 잘 아는 사람도 너일 터이니 하고 주셨었다.
오래되어 표지의 비닐 코팅이 벗겨진 것도 있긴 하지만 지질이 좋아서 누렇게 변색되지 않은 책이다.
가끔 책꽂이에 꽂혀있는 그 책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떠올린다. 중학교 때 학교 백일장에서 시를 써 장원을 했던 적이 있다.
그때 말없이 그 상장을 들고 나가셔서 액자를 해서 내 방에 걸어주셨었지.
그러나 지금 아버지의 딸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밥하고 빨래하고 사는데도 프로가 되지 못했고 자신을 이 세상 가운데 힘있게 세우는 직업인도 되지 못했습니다. 정서도 유전되는 것이라면 아버지의 외롭고 쓸쓸한 정서만은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가족을 만나고 돌아온 저녁입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고 가신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저는 배앓이를 하며 살게 될 것 같은 예감에 휩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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