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신갈나무 투쟁기/차윤정 진승훈/지성사
요즘의 나는 죽음과 너무 친숙하다.
며칠 전엔 친구들 모임에서 들은 소식 하나
내가 잘 알고 지내던 초등학교 동창녀석이 2년 전에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같은 교회를 다녀서 중고교 시기에도 그 친구를 꾸준히 보아왔다. 그리고
같은 동네 살아서 그 친구가 대학에 다닐 때도 석사장교 시험을 볼 때도 동네에서 길 가다 부딪히곤 했다.
아침일찍 친정에 아버지모시고 병원에 다니러 들르던 길에도 그 친구를 보았다.
그때 어리던 나의 큰아이를 번쩍 들어올리며 안아주기도 했는데 자기는 딸을 낳았다며 옆에 있는
아내를 내게 인사시키기도 하던 녀석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국립보건연구원에 있다가 제주대 교수로 재직하던 중 교통사고로 떠난 지 2년이
되었다고 한다.
올해 이런저런 일로 여러가지 죽음과 매우 친숙하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는데도 세상은 여전히 변함없이
무표정하게 아무일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흘러간다.
어쩌면 이 거대한 사람들의 무리는 머물다가는 정거장처럼 비정하게 밀어낸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내릴 때가 되면 내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갈길을 간다.
그게 어쩌면 삶이라는 기차인가?
힘이 들면 누구보다 사람에게 위로받고자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곁을 떠나 혼자 잠잠히 견디기를 더 원한다.
조용히 바라보아야만 더 자신을 잘 볼 수 있고
상처도 아물어가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람의 위로도 그립다.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에 있는 것처럼
넉넉한 인품을 지닌 사람의 그늘에서
내 고민을 다 쏟아놓고 위로받고 싶어질 때도 있다.
외롭기 때문이다.
신갈나무 투쟁기는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숲과 나무의 사진들로
꽉 차 있어서 내 눈을 시원하게 해주고 마치 숲에 있는 착각을 불러 일으킬 만큼
평화와 고요를 주었다.
나무의 삶은 너무나 많이 인간의 삶과 닮아 있어서
보면서 계속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신갈나무는 열매가 뿌리내리고 나서 보통의 다른 식물들이 떡잎을 만들어내는 것에 비해 떡잎을 만들
지 않고 그 과정을 생략한다. 뿌리를 내리고 겨울을 나는 동안 도토리 안에 양분을 저장하고 있다가
낙엽에도 땅 속의 박테리아에도 안전하게 있다가 다음해 뿌리내린 어린 싹이 더 단단히 자리잡을 수
있도록 비로소 양분으로 쓰임을 받고 사라진다. 뿌리와 줄기의 구분점에 한동안 붙어 있다가
사라진다.
"나무는 올해만 사는 것이 아니다.
참고 인내하며 기회를 노려야한다. 길고 짧은 것은 두고 볼 일이다.
그때를 잡을 것이다.
곁가지 무성한 네놈도 두고보자. 나는 언제까지 참을 수 있다.
어린나무의 오기는 오랜 가문의 정통이 걸어놓은 거부할 수 없는 주술이다."
마치 적금을 들어놓았다가 정말로 긴요할 때 그것을 내놓는 부모와 닮아 있다. 부모의 마음엔
더 뒤를 내다보는 준비와 배려가 있는 것처럼 신갈나무 유전인자도 기다린다. 마치 부모가 그를
위해 미리 입력해놓은 배려처럼 말이다.
어린 싹이 단단히 뿌리내리기 위해 더많은 영양분이 필요할 그때를 위해
열매는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이 자신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렇게 자리잡은 어린나무는
적어도 20년은 되어야 자신도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된다고 한다.
신갈나무 투쟁기는 나무가 100년이 되어
나무의 삶을 마감 할 때까지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다.
수명까지도 사람의 삶과 닮아 있다.
20년은 되어야 스스로 생활을 해나갈 토대가 마련되는 사람처럼
신갈나무도 그때가 되어야 성년의 나무가 되는 것이다.
얼마전 오래 전 읽은 김홍경의 <내몸은 내가 고친다>를 다시 읽었다.
다시 한번 내몸의 음적인 경향과 양적인 경향을 진단해보고
피해야 할 것들과 가까이해야할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나무도 음적인 것과 양적인 나무로 분류된다고 한다.
아마도 햇빛의 유무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소나무는 햇볕을 충분히 받고 자라는 나무이므로 대표적인 양적인 나무라고 한다.
그들은 자신의 군락지에 다른 종들이 오지 못하게 뿌리에 독성을 내뿜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소나무 밑에 다른 풀들이나 작은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지 못한 것 같다.
관찰력이 부족하다보니 이렇게 글을 접하고야 상식의 지경을 넓혀간다.
스스로 깨우쳐 아느 정도가 늘 부족하다는 반증이다.
산불이 나고나면 불타고 난 숲속엔 그늘이 별로 없다. 거기에 소나무 씨앗이 날아가 새로 뿌리를
내리고 자라게 된다고 한다.
이것이 숲의 초기과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갈나무는 대표적인 음적인 나무이다. 그래서 소나무처럼 많은 햇볕을 받지 않고도
음지에서도 잘 자란다. 소나무처럼 독성을 뿜지도 않기 대문에 신갈나무 주위에는 다양한 음지식물
들이 같이 자라게 된다. 그래서 울창한 숲을 이루어 간다. 소나무군락지처럼 단일종만 있는 숲이
아닌 것이다. 숲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 이처럼 소나무숲보다는 신갈나무숲이 더 울창해지고 다양한
음지수종이 같이 살기 때문에 숲의 중기나 후기과정에 해당된다고 한다.
절개와 지조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소나무가 알고보면 다른 나무의 접근도 허락치 않는
속좁고 배타적인 나무인 것이다. 소나무는 양지에서 자라기 때문에 더 많은 햇볕을 받기 위해 제각기
잎들이 가지 위를 덮어버린다. 햇볕을 차단해버려 그 밑에 다른 것들이 자랄 여지를 주지 앟는 것이다.
신갈나무와 소나무를 갈아 실험을 했더니 어떤 교배종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서로 한 숲에서 살아가기 어려운 종이라고 한다.
내가 느낀 것은 관용성이라는 측면이다.
신갈나무는 소나무처럼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뿌리에 독성을 뿌리는 것도 아니어서
신갈나무 밑엔 다양한 음지식물들이 깃들여 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사람도 소나무와 같은 사람이 있고
신갈나무 같은 사람이 있다.
너무나 강해서 곁을 주지 않는 사람도 자신만이 햇볕을 받아
많은 양분을 받고
같은 종끼리 모여살겠지만
참 외롭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년에 끝나는 풀의 운명이 아니라
오래오래 견디고 살아내는 나무로서의 삶을 위해서
그렇게 생명을 처음 시작하는 것에서부터 신갈나무는
아주 조심스럽다.
누구도 큰나무로 살아야한다고 강요하지 않지만
어차피 살다가는 삶
누군가의 삶에 그늘좀 넉넉히 베풀고 살면
좀더 의미있고 따뜻한 삶이 되리라 여겨본다.
그것이 외롭고 힘든 이생에서의 삶을 따뜻하고 살맛나게 하는
인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굳이 큰나무로 살 필요는 없다 자신의 그릇만큼 살아내면 되는 것을...
" 당단풍나무 역시 큰 나무이기를 포기하고 숲의 중간을 메우는 나무로 살기로 작정했다. 따라서 당단풍나무는 여간해서 줄기를 하늘 높이 내지 않는다. 남의 자리를 탐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에서
자기를 적응시킨다. 나약하고 자기합리적이라 비난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지만 때로는 체념괴 수긍이
오히려 편안할 때가 있다. 고집은 모두를 긴장시키고 힘들게 한다.
사람이 다른 생물과 다른 점은 지칠 줄 모르는 욕심을 가진 것이라고 했다.
당단풍나무는 모자람을 선택했다. 때로 신갈나무가 병이 들거나 거센 바람에 쓰러져
틈을 내주기도 하지만 당단풍나무는 결코 그자리를 탐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나무를 기다리는 동안 메워줄 뿐이다.
마치 개미가 더이상 몸집을 키우지 않고, 오리가 덤불을 탐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나는 어떤 나무인가?
나무 수령으로 치면 40이 넘은 중년의 나무이다.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잘 자라갈 수 있도록
보살핌을 아끼지 않는 나무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 나무인지
반성해본다.
때로 너무 뾰족하게 굴어
소나무처럼 친구들을 밀쳐낸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부족하지만
신갈나무처럼 함께사는 숲의 나무가 되고 싶다.
더불어 사는 여유를 누리는
숲의 참나무
신갈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