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 중독
일년에 한 번 있는 긴 휴가에 마음을 놓고
무턱대고 잠만 내리 며칠을 잤다.
급한 건 아무것도 없지..새벽녘 눈이 떠지면 다시 시계를 보고 잠들곤 했다.
그러기를 삼사일 하고 나서
집안 일을 하기 시작했다.
휴가 첫날은 이불빨래를 하고 둘째날은 냉장고청소를 했다.
너무 바쁘다는 주문에 스스로 중독돼 차일피일 미루던
냉장고정리를 하려고 들여다보니 빈통이 그득했다.
김치 한쪽도 버리지 못하고 찌개끓여먹어야 한다며
모아놓은 통도 여러 개였다.
크고작은 통을 모두 꺼내어 설거지하고 햇볕에 바짝 말리니
한나절이 다 지났다.
오늘 냉장고를 들여다보니 냉장고가
과일과 된장고추장 외에 들어찬 게 없어서
텅텅 비어 있다.
혼자서 대견한 듯이 씨익 웃게 된다.
동생이 너무 나이차이가 나다보니
놀이에 별로 보탬이 안된다고 여기는 큰아이가 며칠전 만난
외사촌들을 보고 싶어해서 어제 오후엔 일산 작은오빠집에 갔다.
지하철을 한참 타고 가서 주엽역이 아닌 정발산역에 내렸다.
내 친한 초등학교 때 친구가 그곳에서 가게를 운영한다.
멀리 떨어져 살고 서로 일하다보니 만나기가 어려워서 자주 못봤는데
내가 일산에 간다니까 그곳으로 마중을 나와서 우리아이들
저녁을 사먹이고 선물 한개씩 들려서 오빠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아이들 잠자리를 봐주고
친구가 일하는 곳으로 나갔다.
늦게 들어올 것에 대비해 올케에게 집열쇠를 챙겨달래서
가지고 나갔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남편은 내친구를 통해 내 얼굴이 몇년 전 보던 것보다
많이 상했더라는 인사를 전해왔다. 그건 아마도 내 소식을 전해들은
주관적 느낌일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나는 평화롭고 고요하니까...
늦은밤 로데오거리라는 그곳은 사람들로 넘실거렸다.
차를 운전해 가지고 가야한다는 친구와 맥주를 마시고 칵테일을
한두잔 마셨다.
잠들어 있는 오빠네 가족이 깰까 하여 조심스레 들어가니
그집은 거리와 달리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출근하는 오빠와 아침인사를 나누니
전날 운동하러 간다고 나와 얼굴 못마주친 것이 미안했는지
저녁에 일찍 와서 밥사줄 테니 저녁먹고 어제 못본 분수쇼도 보고 가라했지만
나는 아침을 먹고는 떠나서 나왔다.
내 집이 아닌 곳에 오래 머물지 않는 건 내 성격이다.
남편이 며칠씩 출장을 가도 친정에 가면
하룻밤도 안자고 빈집에 돌아와 자곤 했다.
내가 너무 게을러서
익숙치 않은 낯섦에 잘 적응치 못하는 탓이다.
그리고
하루종일 떠들어도 심심치 않은
내 친구들과 달리
인사성멘트를 하루종일 날리며
나와 동갑내기인 올케와
마주앉아 떠들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침나절 오빠집을 나서서
집에 돌아오며 서점에 들러
아들아이 영어책을 사고 만화책도 사고
돌아다니는 둘째 때문에 신간은 겉장도 제대로 구경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며칠동안 느껴지던 내 두통의 정체?
아.. 며칠간 커피를 안마셨군.
냉커피 한잔 만들어 마시고 앉아 이글을 쓴다.
오늘은 하루종일 못읽은 책이나 볼 것을 다짐하며..
오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내 책을 읽었다. 이윤기의 <내 시대의 초상>이라는
연작소설을 보았다. 번역가로도 명성을 날리는 작가라 그런지 문체가 건조한 느낌이 든다.
19세기의 가치관을 배우며 자라 20세기에 적응하고 21세기의 자녀와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깊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해체되어가는 가치관과 무섭게 변해가는 21세기에 두가지를 다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 세대의 고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호모 비아토르..
한곳에 붙박혀 살지 않고 해외로 떠돌며 사는 게 가능해진건
인터넷의 위력이다.
지금 우리가 서울과 부산 대구 구미 또 미국 시카고에 있는 친구들끼리 여기서
떠드는 게 가능한 것처럼
직업에 따라 사는 곳에 구애를 안받는 일이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독후감을 쓰려고 한건 아닌데 떠들다보니 옆길로 샜다.
이렇게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장을 넘기며 오후를 보냈다.
나른해지면
며칠동안 잊고 있던
커피를 마셔야지.
진한
카페인을
호흡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