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여유있는 토요일이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큰아이 선재에게 아침을 먹여 학교보내고(학교 특강을 들으러 다닌다)
선휘를 깨워 커피를 타고 물 한병을 챙겨
선휘의 베낭에 지워주고 동네 산에 올랐다.
남자는 말이지.. 짐을 지고 가는 거야..
겨우 1학년 꼬마에게 남자 운운하며 나는 빈손으로 산에 올랐다.
10분이면 올라가는 산은 야산이라 할 정도로 얕지만 넓게 퍼진 산이기도 해서 산책하기에 정말로 좋다.
하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라 나무가 우거져 있어서
혼자서는 잘 안가게 된다.
아침부터 정신 없는 엄마대신 이모와 함께 토요일이면 산에 산책삼아 다녀오는 선휘가
엄마가 산에 가자 하니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늘이 져 있어서 볕은 따갑지 않았다.
심호흡을 했다. 우이천의 향기롭지 못한 냄새만 겨우 맡고 다니던 내게 산의 맑은 공기는 럭셔리한 향기였다.
어깨를 넓게 펴고 공기를 호흡했다.
이렇게 가까이에 있는 산을 두고 나는 냄새나는 우이천만 걸어다니는 것이다.
산정상에 오르니 아침운동을 나온 할머니할아버지들께서 에어로빅 음악에 흥겹게 맞추어 운동을 하고 계셨다.
흠.. 멋진 분들이군.. 하고 바라보고 있으려니 선휘가 길을 재촉한다.
선휘와 산길을 걸으며
정자에 앉아 쉬기도 하고 나무의자에 앉아 쉬기도 하며
선휘는 물을 나는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집에 오니 정선생님에게 전화가 들어와 있다.
거추장스러워 전화기도 집에 두고 나갔었다. 산에 오르기 전 그녀에게 일정을 물었더니 딸 승빈이가 늦잠을 자고 있으니
일어나면 연락해주겠노라 했었다.
북한산자락의 계곡에 아이들 데리고 놀러가자고 한다.
선휘는 동물원에 가고 싶어했다. 언젠가 동물원에 계곡도 있어서 물놀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나서
거기 가자고 하고 한 시간 후에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
가만가만 인터넷에 들어가 좀 더 알아봐야겠는 걸? 하고 샤워하고 나서 컴을 열고는 블로그에 들락거리고 컴을 껐다.
끄는 순간 아!! 내가 컴을 켠 이유를 다시 기억해내곤 다시 들어가 찾아보았다.. 내 정신머리하곤..
그리고는 가방을 챙겼다.
얼려놓은 물 한 병..조각얼음을 보온병에 담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다남은 아오리사과가 두 알 있다.
그것도 챙기고 선휘의 갈아입을 옷을 챙겨넣고
나보다 먼저 전철역에 도착한 정선생에게 우리것까지 김밥도 사달라고 했다.. ㅎㅎ
선휘가 좋아하는 지하철을 한시간이나 타고
선휘랑 동갑인 승빈이네랑 동물원에 놀러갔다.
입구까지 코끼리열차를 타고
동물원꼭대기까지는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
아이는 태연하게 좋아하는데 리프트밑을 보니 아득하다.. 아 어지러워.. 눈앞만 열심히 보았다.
어린아들의 엄마노릇하기 정말어렵군...
동물원에는 두세번 가본 기억이 있다. 선재가 아주 아기일 때 에버랜드에 가다가 길이 너무 막혀서 차를 돌려
과천에 갔는데 그땐 동물원이 아닌 서울랜드에 갔었다. 그리고 선재가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해서 현대미술관에서 하는 건축전에
데리고 가서 보여주느라 가을날 미술관에 들러오며 동물원에도 갔었다.
또 백두산 호랑이가 들어왔다 해서 잘생긴 백두산 호랑이를 구경삼아 가기도 했다.
모두 선휘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고
여섯 살 선휘와 겨울에 서울랜드에 갔었는데 겁이 많이 선휘는 겨우 두세가지 놀이기구만 타고 아무것도 안타려 했었다.
여덟 살 선휘...
호랑이도 보고 코끼리도 보고 뱀도 보고 낙타도 보고 하마도 보고
또 잘생긴 기린도 보고 돌고래쇼도 보았다.
하지만 선휘와 승빈이는 그 어떤 것보다
어린이놀이터에 이어진 물가에서 노는 것을 가장 즐겨했다.
옷이 다 젖도록 물장구를 치고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어린이집에서 견학을 가본 경험이 있었던지 처음엔 와보았다고 소리를 질렀지만
엄마와 함께 하는 자유로움은 부족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만 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더러 있다. 예전 선재가 어렸을 때 거기서 사준 비눗방울총을 아직도 팔고 있었다.
그때의 큰아이도 뭘 사달라거나 먹고 싶다고 조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선휘도 조르는 법이 없다. 엄마가 아이스크림을 사주면 먹을 뿐
아무것도 사달라고 안한다.. 선재에게도 나는 일부러 기념품점에 데리고 가서 아이게게 뭔가를 사주고 싶어서 골라주곤 했었다.
선휘는 머뭇거리며 아무것도 고르지 않는다. 그러다가 도마뱀인형 하나를 골라서
나는 그것을 사주었다.
까다로운 엄마 밑에서 크느라 알아서 착하게 커주는 고마운 아들들이다.
시아버지사랑을 못받고 살 딸을 위해 그리하신 건 아니시지만 친정아버지가 내게 넘치는 사랑을 부어주셔서 돌아가신 시아버지사랑의 결핍을 못느끼고 살았다. 그래서 살면서 지금도 아버지에게 늘 감사드린다.
그리고 착한 아들들에게도 늘 고맙다.
그것이 부족한 엄마의 미안한 마음이다.
옷을 갈아입히고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왔다.
지금 선휘는 곤히 잠들었다.
오늘 재미있게 놀았으니
다음엔 북한산초입의 계곡에 놀러가자고 하니
선휘는 도리질을 한다.
왜?
놀이공원에 가고 싶어.. 하고 말한다.
돌아오는 길
요란하게 돌아가는 서울랜드의 놀이기구를 본 것이다.
너 무섭다고 또 안탈거잖아.
나 이제 많이 컸거든.. 하고 녀석이 말한다.
그러자..
하고 말했지만
나는 머릿속으로 딴 생각을 한다.
선휘야
가을이 되면 엄마는 오늘 놓친 현대미술관에도 가보고 싶고
산림욕장코스의 길을 걷고 싶어..
그래도
시간이 나면
엄마는 미술관 가는 길을 포기할지도 몰라.
숲길을 걷는 대신 선휘와 꼬마열차를 타고 있을지 모르겠어.
나는 자식을 위해 희생을 일삼는
엄마와는 거리가 멀지.
하지만
선휘가 행복해 할 모습을 생각하면
엄마의 욕망 따위는 잠시 밀쳐 둘 수도 있을 것 같아..
그게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병이거든...지독한 열병.. 하고
혼자서만 속으로 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