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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길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서도 걸을 수 있지만 때로 일부러 장소를 골라 걷는다. 누구든 만날 수 있지만 사람을 가리어 만나는 것과 같다. 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움직이기 싫어하고 시장이나 슈퍼에 가야할 일이 없다면 현관문을 며칠씩 나서지 않을 때도 있는 기질의 나이지만 언젠가부터 이처럼 단정하고 아름다운 길을 만나면 고운 사람을 만나듯이 자꾸만 걷고 싶어진다. 일요일 저녁 친구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시간되면 월요일아침 같이 산에 가자는 제안이었다.  산에 열심히 다니는 친구이다. 그녀의 산행기에 매료돼 그녀가 가는 산행이라면 무조건 따라가고 싶은 기분이 드는 친구이다. 그럼 누구랑 가는 산행인데 가야지.. 암 가야하고 말고... 그러나 다음순간 걱정도 밀려왔다. 집에서 한시간 거리의 산이니 왕복 두시간은 다녀와야하고 다녀와 에너지가 소진되는 수업을 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일었다. 우리집 근처에도 산은 널려 있는데 왜 굳이 아차산? 하고 의문이 일었다. 하지만 산이 있다고 내가 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누구와 함께 산에 가느냐가 중요하지.. 그따위 시간이나 피로쯤은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일찍 일어나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배낭에 사과 물 그리고 전날 사다놓은 캔커피를 챙겨넣었다. 보온병에 끓인물을 담아가서 일회용커피를 타 마실 수도 있었지만 내 취향이 아니라면 그 커피가 맛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스타벅스캔커피를 샀다. 이전에 그친구집에 가서 그녀의 남편이 원두를 갈아 만들어준 커피대접을 받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나야 인스턴트커피에 단련된 별로 고급스럽지 못한 취향이지만 상대방의 취향을 생각하면 그건 별로 대접받지 못할 일인지도 모른다는 왕소심 걱정을 하고 있었다.

 

다소 긴거리의 시간에 길을 나설 때면 언제나 읽을 책을 챙겨간다. 은희경의 신간을 전날 구입한 것을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그래서 오고가는 시간 전철에서 보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하지만 책을 읽다가 간간이 눈을 감고 졸기도 했으니 길긴 긴 시간이었다. 강남으로 수업을 다니는 날에도 이처럼 지하철 안에서 책을 읽는다. 집에서 읽는 시간보다 지하철에서 더 많이 읽는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누리느라 지루한 줄 모르고 강을 잘 건너다닌다.

 

 평소에 울긋불긋한 등산복에 배낭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면 나와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라거나 연령층이라고 여겼었다. 원색의 옷과 흙묻은 등산화 그리고 지치고 나른한 표정은 내게 낯설었다.  그런데 그날의 나도 그 어색한 울긋불긋 등산복을 입고 길을 나섰다. 20대의 나는 청바지에 면티를 걸쳤을 것이다. 땀을 흘려도 이쁜 나이이고 그래도 지금보다는 유연한 몸을 지녀서 신축성이 떨어지는 청바지를 입고도 산에 올랐을 것이다. 허나 지금은 누가 뭐래도 40대.. 그건 무리다. 다소 웃겨도 몸이 힘들지 않게 신축성이 좋은 바지를 입을 일이며 기능성이 뛰어난 옷을 입을 일이다.. 나이 들었으므로 그런 호기는 부리지 않는 게 좋다 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를 하며 여름 그 친구와 함께 등산 가려고 이것저것 샀었다.  그날 드디어 그 옷을 입은 것이다..

 

그 동네 사는 다른 한 친구가 늘 자랑해 마지 않던 광장동 일대 워커힐과 주변 풍경이 이미 익숙한 것처럼 눈에 들어왔다.

10년 넘게 아이들을 키워내고 이모와 친정어머니와 함께 같은 동네에 사는 다른 한친구가 살고 있는 동네.. 아주 오래전 백일쯤 된 선휘를 안고 겨울에 그친구의 리모델링된 집에 초대를 받아 맛있는 점심을 먹고 수다를 떨었었다. 그날은 그멤버들이 다시 모여 산행을 한 것이니 예전 이야기를 나누며 즐겁게 산책 다닐 수 있었다. 결혼을 일찍 해서 올해 대학 1학년 딸을 두었지만 동안이고 피부도 탱탱해서 20대로 착각하게 만드는 친구가 그 동네에 산다. 동네를 들어설 때나 길을 지날 때 그녀의 아이들이 다닌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가리키며 친절한 설명을 아끼지 않았다. 아차산은 고구려 유적지라고 한다. 그래서 이처럼 학교 벽에 고구려벽화를 재현해놓았는데 촌스럽지 않고 고아한 멋이 났다. 어디에선가 주워들은 내 지식에 의하면 고구려미술은 웅장한 미의식이 드러난다고 한다. 신라의 미가 귀족적이고 백제의 미가 유려한 부드러움에 있다면 고구려의 미는 직선적이고 씩씩한 가상을 드러낸다고 한다. 북한의 미술이 이를 본받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강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었던 옛 고구려의 기운이 아차산에까지 뻗쳐 있었던 것이다..

 

10시쯤 만나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평일인데도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한강과 구리시가 보인다는 곳에서 점심을 먹고 사과를 먹고 그리고 친구가 얼려온 맥주를 마셨다. 아! 이 전망이 그리워 이곳에 다시 갈 것만 같다.

내가 조선시대 한량이었다면 하인에게 술과 안주거리를 지고 오르게 하여 이 바위 앞에서 술을 마시며 한강을 굽어보며 시 한수를 지어대고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신윤복의 풍속화에 등장하는 꽃놀이를 기생들을 대동하여 이곳에서 벌이고 있었을까? 전생이 있었다면 전생에 나는 남자였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남자였으면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좀 게으르고 예쁘진 않아도 지금의 나같은 여자를 만나면 사랑할 만 했을까? 그런 끌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함께 산책을 하고 좋은 풍광을 같이 보러다니고 산책나갔다가 가볍게 칼국수나 김밥을 사먹을 수 있는 정도의 따뜻함은 지니고 있지 않았을까? 하고 혼자 짐작해본다.

 

널찍한 바위..에 다다라 점심을 먹기 위해 바위를 오르고 있다 암벽도 아닌 평범한 바위이고 군데군데 발을 디디고 올라서게 장치도 해놓았건만 뒤를 돌아보면 아득하다.. 어.. 무섭단 말이야.. 아앙.. 초보한테 이런 데를 가게 한단 말이야..앙.. 친구들이 놀려댔다. 밧줄도 없는 건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쉬운 길이라서라고 한다.. 그래도 무서워.. 난 겁 많단 말이야..

 

 마지막에 허리를 펴고 일어섰는데 장난기 발동한 친구가 그런 내 모습을 담았다. 아니 이런 면이? 하면서...ㅋㅋㅋ

햇볕이 강했으면 뜨거웠을 텐데 오후에 비소식이 있다고 해서인지 날은 흐렸다. 그래서 걷기에 덥지 않고 편안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음을 정직하게 산은 가르쳐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산은 내 이야기를 다 들어준다. 산에 갈 때 짊어지고 간 고민덩어리들을 모두 들어준다. 그리고 말없이 어깨를 밀어댄다. 이젠 내려가야한다구.. 저 밑 세상으로 내려가서 다시 힘차게 살아보는 거야.. 다음에 올 땐 좀더 가벼운 머리로 올수 있기를 기원해줄게 하고 말이다. 뭐 좀 무겁더라도 그날도 다 받아줄 게.. 고민 따위는 하지 말고 다 짊어지고 올라와 내려놓고 가라고 위안해준다.

 

오르막이 있었다면 내리막도 존재한다는 건 내가 인생의 내리막에 서 있음을 알려준다. 내리막에서 가파르지 않고 편안하고 여유있게 내려서려면 지금부터 건강을 잘 지키고 노년이 외롭지 않게 가족이나 친구와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올 노년에 대비해 산에 오르는 취미를 지금부터 키워간다면 준비를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입을 모아 친구들끼리 자축했다.

 

올라갔다 왔는데도 1시가 되지 않아 워커힐 주변을 걸었다. 호텔에서 공들여 이쁘게 치장해놓은 길을 마음껏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내려와 생태공원 정자에 앉아 준비해간 캔커피를 마시고 전철역에 두시에 도착해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수업을 했으나 머리만 좀 아플 뿐 견딜 만했다. 매일매일이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서 어느 하루쯤.. 그런 일탈쯤이야..어떠랴!

하지만 평소에는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고 집에서 쉬다가 일하러 간다. 오후에 소진되는 내 에너지는 무한정 뽑아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그날의 행복했던 기억을 되살리며..